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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박태원
구보 박태원의 헤어스타일은 무척 독특하다.
윗머리, 옆머리는 덥수룩한데 앞머리는 바가지를 대고 자른 것처럼 일자를 고수하고 있다. 집에서 혼자 잘랐다거나 막 개업한 미용실에 가서 망했다는 사연이 아닌 이상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스타일이다.
(헤어스타일뿐 아니라 안경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대모테라 불린 이 안경은 당시 경성에서 가장 유행하던 스타일이었는데, 대모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거북이 등껍질 무늬를 볼 수 있다. 다만 대모테는 상당히 고가였으므로 실제 등껍질로 만들었다기보다는 대모테 스타일 안경테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기에도 그러하니, 모던보이들이 즐비하던 경성 기준에서도 이는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1931년 가을, 일본 유학을 마친 박태원이 돌아와 위 사진과 같은 헤어스타일(일명 갑빠머리)로 경성을 돌아다니자, 사람들은 그를 '관종'쯤으로 취급했다.
호감은 말도 말고 지극한 악의조차 가지고서 나의 머리를 비난하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나의 사람됨에까지 논란을 캔 이조차 있었다.
어떤 이는 내가 남다른 머리모양을 하고 다니는 것을 무슨 일종의 자가선전을 위한 행동같이 오해하고, 신문 잡지 같은 기관을 이용하여 대부분이 익명을 가지고 나를 욕하였다.
이에 퍽이나 억울했던지 박태원은 1939년 자신의 헤어스타일에 대한 수필을 박문에 기고한다. 자신의 머리가 너무나 억세어 포마드로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저런 헤어스타일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래는 그 기고문 전문.
여백을 위한 잡담 / 박태원
혹, 나의 사진이라도 보신 일이 있으신 분은 아시려니와 나는 나의 머리를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다.
뒤로 넘긴다거나, 가운데로나 모으로나 가름자를 타서 옆으로 갈른다거나 그러지 않고, 이마 위에다 간즈러히 추려 가지고 한일자로 짜른 머리 - 조선에는 소위 이름 있는 이로 이러한 머리를 가진 분이 없으므로, 그래, 사람들은 예를 일본 내지에 구하여 후지다 화백에게 비한 이도 있고, 농조를 좋아하는 이는 만담가 오쓰지 시로에 견주기도 하였으며, 『주부지우(主婦之友)』라는 가정 잡지의 애독자인 모 여급은 성별을 전연 무시하고 여류작가 요시야 노부코와 흡사하다고도 하였으나 그 누구나 나의 머리에 호감을 가져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호감을? 호감은 말도 말고 지극한 악의조차 가지고서 나의 머리를 비난하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나의 사람됨에까지 논란을 캔 이조차 있었다.
단순히 괴팍스러운 풍속이라 말하는 이에 대하여 나는 사실 그것이 악취미임을 수긍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내가 남다른 머리모양을 하고 다니는 것을 무슨 일종의 자가선전을 위한 행동같이 오해하고, 신문 잡지 같은 기관을 이용하여 대부분이 익명을 가지고 나를 욕하였다.
사람이란 대개가 저를 가지고 남을 미루어 보는 법이다. 나의 단순한 악취미를 곧 그러한 것과 연관시키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은 우선 그들 자신이 그처럼 비열한 심정의 소유자랄밖에 없지만, 나는 속으로 무던히 불쾌하고 괘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즉이 그러한 것에 대하여 한마디도 반박을 시험하여 본다거나 구차스러운 변명을 꾀하여 보려 안 하였다.
그것을 이제 와서 새삼스레 끄집어내는 것은 도리어 우스운 일일지 모르나, 이것은 물론 내가 잡문의 재료에 그처럼 궁한 까닭이 아니다.
내가 이 머리를 하고 지내 오기도 어언 간에 십 년이 되거니와,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 다소라도 이름이 알려졌다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나의 그 동안의 문학행동에 힘입은 것으로, 결코 내 머리의 덕을 본 것이 아님은 두 번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내가 내 머리에 관하여 몇 마디 잡담을 하드라도 아무도 그것을 나의 ‘자가선전’인 듯이 곡해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이 기회에 나의 작품은 사랑하면서도 나의 머리를 함께 사랑할 도리가 없어 나의 악취미를 슬프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나는 나의 머리에 대하여 한마디 석명을 시험하여 보고자 한다.
머리에 대한 나의 악취미는 물론 단순한 악취미에서 출발된 것이 결코 아니다. 참말 까닭을 찾자면 나의 머리 터럭이 인력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억세다는 것과 내 천성이 스스로는 구제할 도리가 없게 게으르다는 것에 있다.
내가 중학을 나와 이제는 누구 꺼리지 않고 머리를 기를 수 있었을 때, 마음속으로 은근히 원하기는, 빗질도 않고 기름도 안 바른 제멋대로 슬쩍 뒤로 넘긴 머리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르고 보니 나의 머리는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의 생각대로 ‘슬쩍 뒤로’ 넘어가거나 그래 주지를 않았다. 홍문연의 금쟁장군인 양, 내 머리터럭은 그저 제멋대로 위로 뻗쳤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빗과 기름을 가지고 이것들을 다스리려 들었다. 그러나 약간 량의 포마드쯤이 능히 나의 흥분할 대로 흥분한 머리털을 위무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 나는 취침 전에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빗질을 하고, 그리고 그 위에 수건을 씌워 잔뜩 머리를 졸라매고서 잤다.
그러나 모자나 양복에 언제 한번 솔질을 한 일이 없고 구두조차 제 손으로 약칠을 하여 본 것은 이제까지 도무지 몇 번이 안 되는 그러한 나로서, 머리만을 언제까지든 그렇게 마음을 수고로웁게 하여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아니하여 나는 그만 머리에 기름칠할 것과 빗질할 것을 단념하여 버렸다. 가장 무난한 해결법은 도루 빡빡 깎아 버리는 것이겠으나 까까머리라는 것은 참말 나의 취미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 길게 기른 머리를 그대로 두어 두자니 눈을 가리고 코를 덮고 그렇다고 쓰다듬어 올리자니 제각기 하늘을 가리키고..... 그래서 마침내 생각해 낸 것이, 이것들을 이마 위에다 간즈러히 추려 가지고 한 일자로 짜르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내가 동경서 돌아오기 조금 전의 일이었으니까, 십 년 가까운 노릇이다. 그 사이 꼭 사흘 동안, 내가 장가를 들고 처가에서 사흘을 치르는 동안, 처조부모가 나의 특이한 두발 풍경에 놀라지 않도록 하여 달라는 신부의 간청에 의하여 나는 부득이 기름을 바르고 빗질을 하고 그랬으나, 그때만 빼고는 늘 그 머리가 그 머리인 것이다.
그의 성미나 한가지로 나의 머리가 그처럼 고집 센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이 삼십이 넘었으니, 그만 머리를 고치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이 나의 악취미에서 나온 일이 아니니, 이제 달리 묘방이라도 생기기 전에는 얼마 동안 이대로 지내는 밖에 별수가 없는 것이다.
『박문』 193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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