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인 소파 방정환. 그의 떡입(?)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그는 10살이 되던 해,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를 만들었다. 10살 아이들이 모여 골목놀이나 했겠지.. 싶겠지만, '뜻을 세우는 소년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처럼, 소년입지회는 나름 진중한 면이 있었다. 어린이 회원들은 일요일마다 모여 '벙어리가 나으냐? 장님이 나으냐?' 혹은 '물이 나으냐? 불이 나으냐?' 와 같은 주제로 토론을 하거나 동화 구연을 하고 놀았다. 가끔은 단체 소풍을 떠나기도 했다. 당돌한 아이 방정환이 모임의 회장이었고, 소년입지회는 날로 번성했다. 1908년, 8~9명으로 시작한 모임의 회원수가 1910년엔 160여 명으로 증가할 정도였다. "지금 태평동에 있는 덕수궁의..
1935년 8월, 흥천사(신흥사)에서 있었던 정인택과 권순옥의 결혼식 사진이다. 가운데 양복을 입고 두 무릎을 모아 앉은 이가 신랑 정인택, 그 오른쪽에 흰 한복을 입은 이가 신부 권순옥이다. 권순옥 뒤로 검은 양복을 입고 서서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이가 이상이다. 이 결혼식의 사회는 이상이 봤는데, 신랑 신부 모두 이상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부 권순옥은 이상이 금홍과 헤어진 후 사귄 여성이다. 그녀는 이상이 카페 를 운영하던 당시, 카페에서 일하던 여급이었다. 신랑 정인택은 이상의 절친이다. 그런데 이들이 어쩌다..? 이상과 권순옥이 사귀고 있던 때, 이상의 친구였던 정인택이 권순옥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삼각관계에 빠진 것이다. 그 갈등이 극에 치달아, 정인택이 ..
경성에선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불렀다. 1903년, 한성전기회사는 빈터 야외에 옥양목(얇고 색깔이 매우 흰 천)을 걸어 스크린을 설치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경성 최초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지금의 동대문 종합시장 위치) 정식 영화관이 아니었기에 관객들은 땅바닥이나 목재더미에 앉아 영화를 봐야 했지만,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정기적으로 영화를 상영했고, 그 인기도 대단했다. 뜬금없이 한성전기회사가 영화를 상영한 이유는, 전차사업으로 나빴던 기업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 경성에선 전차로 인한 사고가 잦았고, 낯선 문물에 대한 거부감도 컸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 집집마다 유성기(축음기) 한 대 씩 들여놨다 할 만큼 축음기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집에 구멍이 날 정도로 가난해도 축음기는 들여놓는다고 조롱을 받기도 했었다. 레코드판을 재생할 수 있는 축음기의 보급은 곧, 유행가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춰줬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 경성의 유행가는 주로 영화 주제가였는데, 프랑스 영화인 , 한국영화인 주제가가 가장 유행하던 노래였다. 다방, 카페, 가정집 등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들은 모던-걸, 모던-보이뿐 아니라 학생, 직장인, 아이들까지 즐겨 부르는 메가 히트 유행가였다.
실업자의 심경은 그가 아니면 모른다. 아침에 뜨는 해도 보기 실코, 밤이 뜨는 달도 보기 실코, 모-든 색채 모-든 움직이는 물체, 아모리 조흔 소리라도 다- 듣기 실코, 도대체 사는 것이 실타. 집안에 잇스면 쳐다보고 바라다 보고, 무에 나올가 하고 기대리는 집안 식구가 가엽고, 밧글 나아보면 맛나는 사람마다 “요새 무얼하시우” 하는 말을 드르면 주둥이를 쥐여 박구 십고. 안석주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4.2.9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대공항은 경성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식인 혹은 인텔리로 불린 대졸자 집단의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흔히 '룸펜(Lumpen)'이라 불리곤 했는데, 룸펜은 부랑노동자, 거지 같은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당시 대학까지 졸업했으나 취업하지 못했..
1917년, 경성에 한강인도교가 생겼다. 전철만 다닐 수 있었던 철도교를 개량해 자동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생겼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한강인도교는 순식간에 경성의 명소가 됐다. 낮엔 경성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밤엔 화려하게 밝힌 한강인도교의 전등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강을 걸어서 건넜다가 돌아오는 산책 코스도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부적용도 있었다. 투신 자살을 하기 위해 한강인도교로 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관광의 명소뿐 아니라 자살의 명소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여담. 한강인도교는 6.25 전쟁 중 폭파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일만인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 시민 여러분, 안..
1920~30년대 경성엔 만문만화(漫文漫畵)라는 게 있었다. 시사만평의 할아버지급 정도라 할 수 있는데, 만평과 달리 만화와 만문(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글)이 함께 있는 형식이었다. 만문만화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작한 인물은 석영 안석주였다. 그는 주로 사회비판적인 만화를 신문에 연재했었는데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가 언론 탄압을 강화하자, 시사만화를 그릴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탄압을 피하기 위해 직접적인 대사가 있는 만화를 포기하고 우회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의 만화를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만문만화다. 자연히 만문만화는 식민지 경성의 세태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1931년 발표한 위 만문만화는 비싼 학비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음에도 수업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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